[한국전쟁 70주년-음식에 서린 기억] 부산음식 속 한국전쟁 이야기

입력 : 2020-06-26
사진자료 : 게티이미지뱅크·구글

 

실향의 애달픔 달래주고 가난의 배고픔 채워주고

 

1·4후퇴 때 피란민 대거 몰려 인구, 전쟁 이전의 두배로 급증

생존 위해 새로운 음식 만들어

흥남서 냉면집 운영했던 이가 온갖 고생 끝에 개발한 ‘밀면’

먹지 않고 버려졌던 ‘곰장어’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 급부상

사골 짧게 우려 맑은 국물 낸 ‘이북식 돼지국밥’

 


한국전쟁 전 약 47만명이었던 부산의 인구는 1·4후퇴 이후 거의 두배로 급증했다. 가진 것은 맨몸뿐인 가난한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대거 몰려온 것이다. 안 그래도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사람만 불어난 부산에는 새로운 음식들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삶에 정착하기 위해 여러 음식들을 만들어냈다. 전쟁이 나도 사람들은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사람들은 새로운 음식을 만들고, 먹지 않았던 것을 먹으며 새로운 삶에 적응했다. 그러다보니 피란민들이 유난히 많았던 부산에는 전쟁을 겪으며 만들어진 음식들도 많다.

(왼쪽부터) 내호냉면의 물밀면. 성일집의 양념 곰장어. 할매국밥의 돼지국밥.


부산의 별미로 인기를 끄는 밀면은 함경남도 흥남 출신 피란민이 만든 음식이다. 원래 이북에서 냉면집을 운영했던 이가 맨몸으로 내려와 온갖 고생을 한 끝에 개발했다.

“감자전분은 엄두도 못 냈고 고구마전분도 너무 비쌌어요. 농마국수(냉면)를 팔아도 피란민들은 비싸서 못 먹었어요.”

우리나라 최초로 밀면을 만든 ‘내호냉면’의 3대 주인장 유상모씨의 말이다.

2대 사장인 어머니 정한금씨가 동항성당 하안토니오 신부가 나눠준 배급 밀가루에 고구마전분을 조금 섞어 만든 것이 찰진 밀면이다. 값싸고 맛있어, 가난하고 마음이 고달픈 피란민들이 냉면 대신 많이 찾았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참 그 (고향의) 맛을 잘 냈지. 이 집은 지금도 맛이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벽에 걸린 정한금씨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단골 박경임씨(78)의 고향도 흥남이다. 어느새 사람은 떠나고 그들의 음식만 유산으로 남았다.

음식이 아니었던 것이 음식이 된 경우도 있으니, 바로 곰장어다. 당시 곰장어는 흔히 잡히는 물고기였지만, 사람들이 먹지 않아 마치 오늘날 불가사리처럼 항구에 버려져 있곤 했단다. 그랬던 곰장어의 위상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달라진다. 가난한 부산 토박이들이 어쩌다 먹긴 했지만, 피란민들이 부산에 온 후 빈민층이 대폭 늘어나자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부상한 것이다.

곰장어는 새로운 산업도 탄생시켰다. “내가 시집온 후에도 피혁공장은 없었어요. 나중에야 버린 장어가죽으로 지갑 만들고 그랬지.” 1950년부터 곰장어를 판 ‘성일집’의 2대 사장 최영순씨의 말이다. 한국전쟁 덕분에 곰장어는 가죽과 별미라는 명예를 동시에 남기게 된 셈이다.

국밥의 유래야 전국 팔도의 장터 아니겠나 생각하겠지만, ‘부산’ 돼지국밥의 유래는 사정이 좀 다르다. 조리법에 따라 뽀얀 국물의 경상도식과 맑은 국물의 이북식으로 나뉘어서다.

부산 이북식 돼지국밥은 한국전쟁 때 피란민에 의해 탄생했다. 경상도는 육수를 끓일 때 사골을 오래 고아내지만, 이북은 단시간 사골을 우리고서 여기에 살코기를 넣고 끓여 국물을 말갛게 만든다. 맑은 국물을 내는 돼지국밥집은 피란민이나 피란민 어깨너머로 이북식 조리법을 배운 부산 토박이들이 대를 물려 운영해왔다.

그중 ‘할매국밥’은 평양이 고향인 피란민 최순복씨가 1956년 개업한 곳이다. 들어가는 돼지고기 부위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옛날에는 값싼 돼지머리 부위를 사용했지만, 이제는 비계가 붙은 삼겹살을 넣어 국밥을 만든다. 단, 숭덩숭덩 크게 썬 돼지고기와 밥을 육수에 토렴해 손님상에 올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다.  

부산=이연경, 사진=김도웅 기자

ⓒ 농민신문 & nongmi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기사